『영일소품』은 1909년 1월에 「새해」가 아사히 신문에 게재되었고, 1월 14일부터 3월 14일까지 오사카 아사히 신문에 24편이 게재되었다. 그 가운데 14편은 도쿄 아사히에도 게재되었다. 1910년 5월에 「몽십야」, 「만한 곳곳」, 「문조」와 함께 『소세키 근십 사편(漱石近什四篇)』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일상 속에서 재제를 취한 것과 런던 유학 시절에서 재제를 취한 것 등 다양한 소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편 「산시로」 이후에 「몽십야」처럼 짧은 글을 연작으로 써달라는 요청에 의해서 집필한 작품이다.
‘소품’이란 소설이라고도 할 수 없고 수필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말하자면 소설과 수필의 중간쯤에 위치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처럼 형식에 구애받지도 않고 수필처럼 현실의 일에만 한정되어 있지도 않기에 오히려 자유로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참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
도쿄 명문가의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긴노스케. 당시 어머니는 고령으로 ‘면목 없다’며 노산을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12세에 도쿄 제1중학교 정규과에 입학하지만 한학 · 문학에 뜻을 두고 2학년 때 중퇴, 한학사숙에 입학해 이후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유교적인 윤리관, 동양적 미의식, 에도적 감성을 기른다. 22세 때, 문학적 · 인간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만나게 되지만, 잇따른 가족의 죽음으로 염세주의, 신경쇠약에 빠진다. 대학 졸업 후 도쿄에서 영어 교사로 있다가 1895년 고등사범학교를 사퇴하고 아이치 현의 중학교로 도망치듯 부임해 간다. 이후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영문학 연구에 거부감을 느껴 신경쇠약에 걸리게 된다. 귀국 후 도쿄 제국대학 강사생활을 하다 또 다시 신경쇠약에 걸리자 강사를 그만두고 집필에만 전념하던 소세키는 1907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계속되는 신경쇠약, 위궤양에 시달리다 1916년 12월 9일에 대량의 내출혈이 일어나 『명암』 집필 중에 사망했다. 마지막 말은 ‘죽으면 안 되는데’였다고 한다.